<공간 2005 2월호>


경험에 대한 분열적 징후들 ; 송상희

김장언 (미술평론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근대성의 경험이 내제화되고 표출되는 방식은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매우 모순적인 상황만큼이나 복잡하다. 그것은 근대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실제적인 사회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특수한 때로는 비논리적인 경험이나 역사 및 현실 인식을 가리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집단적 기억이나 행동양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이 작동되는 출발지점은 언제나 미시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며 그것은 징후적으로 주체의 정신과 육체 모두에 각인되고 표출된다. 근대성의 경험이 징후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육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근대성에 대한 이성적 성격에 근거한다기 보다 오히려 근대성의 의미체계가 소화 혹은 이해할 수 없었던 잉여적 상태 혹은 잉여물에 근거할 것이다. 이러한 잉여물들은 근대성이 만들어 놓은 기념물들에 위반하거나 상응하는 세속적인 욕망과 환상이 될 수도 있으며 정신병리학적 증상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령과 같이 사멸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사멸될 수 없는 실체로 우리에게 존재한다.
작가 송상희는 이러한 근대성의 경험이 야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집중한다. 그러나 그가 집중하는 근대성의 경험은 오히려 근대성이 만들어낸 현재의 가시적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 개인에게 훈육되고 내화된 정서적 신체적 징후들에 대한 이면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그가 집중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자신이 포함된 혹은 포함되었다고 믿는 (프티) 부르주아지 계급 문제와 엘리트 교육제도가 함축하는 게임의 법칙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자신의 정신분열에 근거한다. 설사 그가 공적 담론 내부에서 근대성이 내화시킨 경험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저에는 자신의 정신분열적 징후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작가 개인에게 남겨진 근대성의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 치유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정신분열적 자기 상태에 대한 고백과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환상과 욕망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훈육의 기억과 자학적 정신분열증
송상희의 두 번째 개인전인 <기계들>은 이러한 그의 징후들을 암묵적으로 가시화시킨 전시로 기억된다. <성공을 위한 몸 보정기>의 연작과 일련의 매뉴얼들 그리고 상품 전단지를 보여주었던 이 전시에서 그는 근대성이라는 제도적 합리화가 개별 주체들에게 요청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몸가짐을 물신화된 형태로 드러냈다. 그는 훈육과 관습에 의해서 육화된 예절을 공학적으로 계량화시켜 ‘명함주기’와 ‘인사하기’등과 같은 기계장치를 고안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기획 제작 유포되는 다양한 상품들과 그 상황들을 은유했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놀이시설처럼 제작된 그의 기계들은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야기할 소외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거나 심각하게 계량화함으로써 육화된 몸의 기억을 희극적으로 재현했다.
그러나 이 전시들에게 주목해야 하는 기계들의 본질은 아마도 <착한 딸이 되기 위한 몸짓> 연작에 있을 것이다. ‘도구화된 손’, ‘바른 자세로 앉기’ ‘마법의 보자기’ 등으로 분화된 그의 기계들은 ‘착한 딸’이 되어야만 하는 집착과 공포 그리고 환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착한 딸’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요청하는 착한 딸이자 성실한 아내라는 것이다. 아버지 혹은 남편이 퇴근 후 벗어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팔과 손의 각도를 고정시켜 주거나 고상한 부인 혹은 잘 교육받은 여성을 상징하는 에티켓으로써 바른 자세를 위한 의자가 그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차밍스쿨에서나 만나게 되는 극화된 중산층 여성의 몸동작을 계량화했다고 할 수 있다. ‘착한 딸’에 대한 집착과 공포 그리고 환상은 ‘마법의 보자기’에서 궁극적으로 세디스트적 상황으로 재현된다. 이 보자기는 언뜻 페딩점퍼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지만, 기실 개인을 포박하는 형틀에 불과하다. 이 ‘마법의 보자기’는 훈육의 과정이 성실히 수행되지 않았을 경우 체벌의 장치로 육체를 억압하는 도구이지만, 반면 고통을 통해서 ‘착한 딸’이라는 판타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능하게 하는 자학/자위의 기제이며 정신분열의 징후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구조화된 근대성의 의미구조가 우리사회 중산층 여성에게 부가한 ‘착한 딸’ 혹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화된 자기 고백이며 이것은 곧바로 고통이 쾌락의 상태로 전이되는 정신분열의 상태를 함축한다. 이러한 분열적 자기욕망은 검정테이프를 몸에 칭칭 감고 거실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영상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과 신화의 육화와 재현
근대성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맥락을 기계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드러냈다면 작가는 구체적 역사적 사건과 구조화된 신화의 상황을 재연/재현하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근대성의 경험이 개인에게서 어떻게 내화되고 작동되는지를 다소 공적인 맥락에서 보여준다. <국립극장>과 <영부인A>는 영부인 육영수의 저격사건이라는 구체적 실화를 통해서 6 70년대 공포정치의 맥락과 국모(國母)로서 신화화된 한 여성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재맥락화한다. 작가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성화(聖化)되었던 인물의 실제 죽음을 다룬 영상물 <국립극장>과 국가표준영정을 떠올리지만 숭고한 한줄기 눈물을 흘리는 사진 <영부인A>를 제작했다. -저격에 의한 육영수의 실제의 죽음은 이미 유령처럼 성화되었던 인물에 대한 어떤 종교적 의식의 재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얼핏 이 두 작업은 근대성에 의해서 구조화된 의미구조를 재연/재현함으로써 그 의미구조를 전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립극장>에서 이러한 전복적 의미의 재생산은 매우 효과적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국립 ‘극장’이라는 장소는 실제 사건의 극적 상황 그리고 극적 재현 모두를 다층적으로 함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격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공연한 전체 영상작업으로서 <국립극장>의 의미는 저격이라는 상황의 재현에 있다기보다 반복적인 다음 촬영을 위해 옷매무새와 머리를 손질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각각의 인터미션에 있는 것 같다. 이 인터미션이 갖는 의미는 성화된 인물에 대한 작가의 근대적 경험이 내화된 상태를 표출하기 위한 성서스러운 종교적 예식의 전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6 70년대를 관통했던 소녀들에게 따르고 배워야 했던 전범(典範)으로서 육영수의 이미지는 맹목적 아이콘의 대상이며 앞서 보여주었던 ‘착한 딸’이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가치는 떨쳐버릴 수 없는 기억의 징후로 작가의 인식과 신체 모두에 각인되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부인 A>의 눈물은 실제 인물의 눈물이라기보다 오히려 극화된 연기자로서 작가 자신의 반성적이고 참회적인 눈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의 가능성은 육영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우리사회에서 의미화되는 방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육영수는 그의 파트너이자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와는 다소 상이하게 근대성의 의미구조 속에 안착된다. 박정희는 생권력의 화신으로서 모든 파시즘적 양태들을 우리의 미시적 삶에 작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되뇔 수밖에 없도록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트라우마를 만들어내게 했다.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이러한 트라우마는 폭압적 정치체제를 먹고사는 문제로 직결시킴으로서 모든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받는 방식으로 의미화된다. 그러나 육영수의 경우는 가부장제적 인식체계 내부에서 이미 조건없는 윤리적 실존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는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 놓은) 근대성의 의미구조 내부에서 현모양처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창조된 전통과 과거, 고통스러운 현재와 희망찬 미래를 관통하며 초역사적이고 비정치적이며 탈속적이고 무성애적인 존재로 변화된다. 어쩌면 우리는 현재까지도 그의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박정희)를 조건 없이 사랑하며 인고해 냈던 마리아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아이콘에 대한 경험과 그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화시키고 표출하는 작가의 방식은 착한 딸 뿐만 아니라 성실한 아내 혹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성녀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근대적 경험에 대한 분열적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사회 정치적 제도에 의해서 여성에게 부가된 부르주아적 가치의 내면화에 대한 분열적 자기 표출을 넘어 근대적 신화에 의한 분열적 징후의 일반화 과정 전체로 확대하고자 하는 것 같다. 월미도 앞에서 버스 안내양의 복장을 한 작가의 환한 웃음은 시골에 있는 가족의 생계나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해서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남동생을 위해서 희생하는 버스 안내양의 일상적 고통을 희극화시킨다기 보다 오히려 경제활동이 개인에게 야기하는 소외적 상황을 희극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수절한 여인네가 바닷가 암벽 위에서 망부석이 쓰여진 붉은 깃발을 이고 먼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은 제도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성적 욕망을 희극화시킨다기 보다 오히려 모든 욕망을 분출하고자 하지만 그 욕망은 언제나 미봉책처럼 해소된다는 자학적 상태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을 상징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의 내면화에 대한 일반화의 작업은 오히려 표석 작업 시리즈로 시작된 새로운 역사 쓰기 작업에서 본격화 된다.
<버려진 알>은 고주몽 신화를 서울 주택가의 쓰레기장에 재현 설치함으로써 근대적 민족 개념과 국가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발견되고 신화화했던 역사적 사실을 탈각한다. 재활용 의류들과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장소에 버려진 알은 근대성이 재맥락화한 주몽신화의 신성함을 희극적으로 재현한다.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신화의 텍스트는 해모수의 사통에 의해서 낳게 된 알을 유화가 불길하게 여겨 주택가 쓰레기장에 버렸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 알이 주몽과 같은 신화적 인물을 잉태하고 있다고 믿고 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학수고대한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신화와 그것에 의해서 훈육된 개인 주체들의 의도치 않은 과잉 믿음이 만들어내는 상황의 전도는 재맥락화된 근대적 신화의 의미체계를 희극적으로 전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태평성대를 꿈꾸는 호랑이>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민족과 국가의 기원으로 호명되는 단군신화를 북한산에 재맥락화하는데 있어 ‘곰’이 아닌 ‘호랑이’를 등장시킨다. 배고품과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던 단군신화의 그 호랑이가 4373년 만에 다시 그 동굴로 돌아와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 인간이 되고자 패자부활전을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곰으로 상징화 되는 인고에 대한 여성적 가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호랑이가 와신상담의 의지를 불태우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는 새로운 신화인 것이다. 더욱 희극적인 상황은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신화의 내러티브를 실제로 믿게 된 보살을 산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렇듯 근대적 신화가 억업했던 개인 주체의 정신분열은 다른 정신분열들과 조응하면서 비합리적 합리성을 창조해 내고 있고 이러한 분열적 징후들을 작가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견고한 것들이 녹아 없어진 이후
이성과 광기의 양면이 존재하는 근대성의 모호한 실체 앞에서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분열적 징후들과 매순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근대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부르주아적 혹은 자본주의적 기념물의 정서 내부에서 우리는 개인적 욕망과 신념 혹은 운명이라는 분열적 징후들을 포함하고 살아가고 있다. 송상희는 가정과 학교, 사회 내부에서 훈육되고 내화시킨 근대성의 경험을 개인적 상황과 역사적 사건 그리고 직조된 신화, 모두를 가지고 표출하고 있다. 어떤 순간 그는 작업을 통해 상황을 희극적으로 제시하기도 하며 근대성에 대한 자신의 분열적 징후들에 대해서 몰입하고 그 상태를 즐기기도 한다. 이러한 분열적 상태는 개인 주체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유희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그 분열적 징후를 즐기며 자체 내부의 새로운 합리성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견고한 모든 것들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는 의미를 재확인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명확하게 신성한 모든 것들이 세속적인 것이 되었을 때, 마침내 인간은 냉정한 감각으로 자신의 실제 조건과 상황과의 관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견고하고 신성했던 모든 것들의 의미와 개인 주체가 냉정한 정신으로 자신의 조건과 조응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견고했던 것들이 세속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녹아 없어지지 않고 그 견고함을 강화시키기도 하며, 냉정한 정신은 오히려 몽롱한 정신으로 변화되면서 저항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변화된 조건 내부에서 근대적 기념물들이 개인 주체에게 야기한 분열적 징후들을 가지고 우리가 생존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생존하면서도 또한 저항과 대안 혹은 새로운 가능성을 명시할 수 있는 방법론은 무엇일까. 송상희의 경우 그것은 분열적 징후들을 즐기며 그 내부에서 비합리적인 합리성을 생산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정신분열적 근대성에 대해서 그것을 과도하게 거부하는 방식이 아닌 그것을 과도하게 용인하면서 그 징후를 병리학적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