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올해의 작가상,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의 피부’를 어루만지다

백지숙(미술평론, 전시기획)

작품의 과거 – 변증법적 이미지로 읽기
오래전 인터뷰에서 송상희는 “칼날 같은 곳에 정확하게 서고 싶은 욕망” 에 대해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정체성 정치를 벼리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나온 이야기다. 나는 그 칼의 양날이 딸과 어머니 로, 창녀와 요조숙녀 로, 영부인과 ‘영자’ 로, 그리고 좀더 나중 작업에서는 선교사와 원주민 으로 바뀌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마다 칼날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통과 근대, 식민주의와 세계화 또는 성과 속, 정상과 비정상 등 문화체계를 구성하는 양날의 전형을 연기할 때, 송상희는 주어진 대로 역을 하기보다는 전형성에 육체를 부여하여 체제와 담론을 위태롭게 만드는 ‘연기론’을 따르는 것 같다. 어쩌면 성실하고 열심히 역할을 하다 보니 혼연일체가 돼서 어느덧 작가 자신이 배역을 능가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배우 도금봉이 영화 <유관순>(윤봉춘 감독,1959년)에서 민족독립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한국의 잔다르크 역을 맡았을 때처럼 말이다. 영화 속 고문 장면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배우의 육체성은 3.1독립만세사건을 압도하며 전형적인 민족극영화를 기이한 호러물로 ‘변질’시킨다. 마찬가지로 송상희가 흘리는 영부인의 눈물과 영자의 미소는 자애와 근면이라는 가치의 표상을 뚫고, 독재와 경제개발시대에 억눌린 여성의 희생심 또는 일말의 복수심을 으스스하게 소환한다. 여기서 영부인과 영자는 서로 다른 캐릭터가 아니라 동일한 육체에 잠복해 있다가 사회 조건과 특정 상황에 따라 튀어나오는 다중인격이고, 인격 붕괴를 막아주는 유일한 지배권은 송상희 작가 (혹은 그와 동일시하는 나) 자신이 쥐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송상희의 칼날은 국민국가가 개인에게 강제해온 집단 기억과 공식사에 균열을 내고, 개별 육체 속에 새겨져 있던 정신적 외상과 숨겨둔 생애 비밀 까지 드러나게 한다.

한편, 등장인물이 서 있는 사진 속 장소는 월미도, 매향리, 동두천처럼 미군이 한국 영토를 공격하거나 주둔하며 때때로 국민국가 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렸던 곳이다. 구조가 아니라 사건을 통해 배치되는 사진 속 생활 체계 안에서는 인간 신체도 사회적 풍경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가령 <푸른 희망>이 잘려나간 팔, <매향리>(2005) 여학생을 쏜 화살자국 그리고 <동두천> 여성의 눈과 입을 가린 검은 테이프는, 피해자 신체에 남은 범죄 지문처럼 현장을 구성하고 있다. 지정학적 풍경에서 이는 가부장 국가 흔적이 남아있는 지형인 동시에 주권 부재를 알리는 공터에 다름 아니다. 초강대국이 점유한 국가 영토에서는 내부를 억압하고 외부를 배재하여 구축한다는 정체성의 미장센이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그 대신 내부를 억압하고 또 내부를 배제하는 미장아빔, 곧 마주 선 자국自國 이미지가 서로를 반영해 만들어내는 끝 모를 허공만 가득해진다. 1800년 전 고구려시대 광개토왕비를 래핑하여 허공 속에 띄워놓았던 대형 설치 작업 <신기루>(2006)가 근대국가 정체성에 관한 텅 빈, 반역적 기념비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공의 미래 – 수사법으로 읽기
그래서인지 송상희는 “어디든지 서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결국 허공에 떠있었는지도 모른다” 고 토로한다. 칼날과 허공 위를 오가며 작두 타기를 하던 작가는 이제 공중부양을 시도한다. 국제정치 역학관계가 강화되면서 허약해진 국가정체성은 이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던 젠더 정치학을 탈구시키고, 그 사이 작가는 세계시민으로 ‘도약’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가 정체성 정치 칼날 위로 높이 부양할수록 국민국가 이데올로기로 포획되는 허공은 더 커지고 한 나라의 영토와 상공 경계 너머, 전지구적 시야로 초국가주의 신화가 펼쳐진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작가 레지던스에 참여했던 2006년 제작된 프로젝트, <달맞이 꽃>은 국제 성노동자 조합(International Union of Sex Workers)을 비롯한 관련 기관 네트워크를 통해 성노동자의 자작시를 공유하면서 시동이 걸린다. 작가는 시 텍스트를 암스테르담 홍등가 한가운데 있는 교회 담장 위 가로등 빛으로 투과했고, 오가는 사람과 성구매자는 인도 위로 비취는 빛-시를 읽을 수 있었다. 이때 ‘붉은 어둠’을 가르는 빛과 시라는 매체는 성노동자 일반을 대상화하거나 대표하기는커녕, 시를 쓴 사람마다 품고 있는 독자적 감성과 특이성을 효과 있게 실어 나른다. 착상에서 전이에 이르는 과정 내내 섬세하게 조율했던 작가 역시 이들과 정서적으로 조응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어떤 세계 내 존재로 자각한다 . 그런데, <달맞이 꽃>은 한 성노동자가 밝아진 홍등가 실상에 불편함을 느낀 나머지 철거를 요구하면서 작품 이름에 걸맞게도 한밤이 지나자 스러졌다고 한다. 아마도 프로젝트의 급작스런 중단은 작가가 세계 속에서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묵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국제 레지던스 체류 기간이 끝나자 송상희는 해외이주를 결정한다. ‘헬조선이 싫어서’ 한국을 탈출한다는 이후 세대와 달리 그는 종전 이후 한국사회의 지속적인 정치경제 발전을 통과한 세대 끝자락에 속한다. 또 이전 세대와 달리 문화교양이 체계 있게 축적되고 공공 문화지원이 확대되는 추세에서 성장한 작가 세대 첫머리에 속한다. 이런 그에게 이주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뜻했을 것이다. 전근대와 탈근대가 압착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자라난 비혼 여성으로서 생활상의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 더불어 작가로서는 보다 개방된 지식과 유연한 기술력에 직접 접속하기 위해서 이주를 선택했으리라 짐작한다. 이주 전후로 작가는 “모국을 떠난 비서구권 작가가 ‘해방’ 과정에서” 겪는 복잡한 자기검증과 새로운 적응 노력을 거치며, 이 과정에서 회의와 만용을 오가는 여러 예술적 시도를 감행한다. 심지어 그는 미리 죽는다. 반역적 애국주의자가 끝내 조국을 등지는 데서 오는 자책감이나 가족 친지를 모국에 두고 홀로 떠나는 데서 오는 자괴감 대신, <그녀의 장례식>(2006)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2006) 송상희는 기꺼이 임사체험을 선택한다. 그러고 나서 네덜란드 거주권을 신청한 해, <변신 이야기 제16권>(2008, 이하 변신)을 완성한다. 이 작품을 통해 송상희 작업은 탈식민주의와 문화 정치적 지형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현실의 정체성들이 이루는 거대한 네트워크와 한데 엮인 작가 일반의 복잡한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제시 한다는 평을 받게 된다.

<변신>에서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기존 시스템과 굳건한 전형을 해체하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서사 텍스트를 직조하는 쪽으로 작업이 선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오비디우스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창조론과 진화론, 과학과 설화, 역사적 사건과 우화적 공간을 넘나들며 인간과 동물, 생물과 사물로 변신하는 무성체가 주인공이다. <동두천>에서 눈과 입이 막혀있던 인물은 <달맞이 꽃>에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며 드디어 <변신>에서, 내레이터로, 제 목소리를 낸다. 살해당하고 자살하고 결국 지구와 함께 자폭하는 비극적 주인공들을 추적하다가 바닷속 고래 소리에 엔딩을 내어주기까지, 목소리는 신중하고 사려 깊지만 멈칫거리는 톤을 유지한다. 여기서 내레이션은 다성의 변신체들을 유일 저자 목소리로 환원하거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전쟁과 식인 풍습, 자기복제, 음파탐지기에 위태롭게 흔들리며 사랑과 복수를 감행하는 주인공들은 자본과 군사산업, 금융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된 동시대 인생의 불안정성과 취약함에 오롯이 노출돼 있다. 그리고 작가 목소리는 그런 ‘느낌을 담는 그릇’ 일 뿐이다.

변신이라는 테마를 생동감 있게 구현하던 연필 드로잉 애니메이션은 검은 기름이 온 지구를 뒤덮는 파국으로 끝맺는다. 기름 대홍수를 선취하는 다국적 정유가스 회사 BP의 멕시코만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 폭발 사고(2010)는 송상희가 작업화했던 태안의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모항>, 2008)와 함께 해양 생태계를 강타한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 막대한 기름유출량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인류의 존재와 인식 방식 그 자체를 파국에 이르게 한다. 끈적거리는 검은 기름이 퍼져나가는 망망대해를 보면서 우리는 세계 종말에 근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태 이론가 티모시 모튼은 이 기름 덕분에 우리는 ‘세계’라는 관념에 구멍을 내어 태우게 되었다고 적는다. 재난 규모나 영향력이 이미 개별 국가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고 인류세 이후 지구 멸망의 가속도는 통제불능이 돼버린 이런 세계에서, 생태란 환경으로서의 자연을 훨씬 초과한다. 지구 온난화와 초미세먼지, 방사능 물질과 음향무기는 보이지 않는 독가스처럼 퍼지며 폭넓은 일련의 관계들을 변질시키고, 아예 인간 주체의 세계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름처럼 끈적거리는 점성을 가지고 주체에 달라붙고 침투하여 막을 만들어내는 하이퍼오브젝트들은 녹아내리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주체가 사물을 거울에 비춰보는 능력, 곧 거울 속 반사된 세상을 바라보듯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능력이 드디어 녹아버리기 시작했다.

2017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송상희는 사방 20미터가 넘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양 끝으로 ‘평면’ 작품 두 점을 배치한다. 여기서 우선 나는 이렇게 휑하게 비어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사실 송상희의 몇몇 작품 은 크고 또 비어있다. 그의 작품에서 허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기와 상관이 있는데, 클수록 비어있으며 비어 있을수록 크다. 이를 질료에 관한 친환경주의 관점 혹은 크기에 대한 여성주의 패러디로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는 허공을 구성하려 하는 것 같다. 전시공간의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는 – 전례 없이 북미 간 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 시간을 앞으로 빨리 감아서 맞닥뜨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우리 감각에 제시한다. 끈적거리는 점성의 시대에 사라졌던 세계와 나 사이 거리, 세계를 반사하는 작품과 나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해서 다시 생겨난다.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
작가에 따르면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 코라는 플라톤의 Khora 즉 ‘생성의 수용자’ 개념에서 왔다고 한다. 코라는 태초의 물질이 구성되기 이전에 형성돼 있던 공간이다. 존재도 생성도, 형상도 모방도, 존재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사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코라 공간은 그릇이면서 위 혹은 자궁이고, 따라서 그저 비어있어 물질에 의해서만 형태를 얻을 수 있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들어오는 물체들을 구분하고 배치하며 이질적인 운동성을 부여하는 힘을 나름대로 갖는다 . <변신>에서 코라는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을 통해 계속 변신하는 생명체이자 그들 사이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물체였다. 이번 전시에서 코라는 종말 이후 생태에 영양을 제공하여 생성시키는 ‘유모乳母와 같은’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아가를 담아 살려낸다.

-인터미디어 모자이크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2017, 이하 아가)는 탄생과 죽음, 반역과 진압, 학살과 부활이 루핑 되는 한국전래 영웅설화, 아기장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양식상으로는 <그날 새벽, 안양-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2014, 이하 안양)과 <변강쇠歌 2015: 사람을 찾아서>(2015, 이하 변강쇠歌 )에 이어, 아카이브 필름과 다큐멘터리 비디오, 사진, 연출된 자료화면과 연필 드로잉 그리고 텍스트와 사운드를 몽타주해서 나름의 시각 문법을 구축했다고 여겨진다. <안양>은 인물 움직임이나 사건 발생을 최대한 억제하여 도시 야경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비디오가 주축을 이룬다. 하지만 극락정토 세상에 모두가 편안하게 숨 쉬는 곳을 뜻한다는 근대 산업도시 안양은 이 작품에서 핵폭발 이후 미래사회로 설정됐다. 그래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디스토피아의 정체를 폭로할 때, <안양>은 SF에 가깝다. 여기에 연필 드로잉 두루마리 그림 두 장이 같이 걸리고 영상과 싱크로 된 색색의 무빙헤드 스포트라이트가 그림 부분 부분을 하이라이트해서 작품 전체는 만화경처럼 다채로와졌다. 일 년 뒤 전시된 <변강쇠歌>는 크기가 다른 모니터 세 대와 스크린을 사용해 영상과 텍스트를 나누어 틀고 전시장 곳곳을 스포트라이트가 움직이며 비취는 설치작품이다. 한국 고전 포르노그래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시체장사 스토리로 각색해 넣어 한층 다층화된 비디오 오페라 기법 을 보여준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채널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과도하게 눌러 넣어 모니터-프리마돈나가 챕터를 끌고 가는 오페라 무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가>는 크고 썰렁한 상영 공간을 작품의 ‘구성적 외부’로 두되, 드로잉이나 하이라이트 조명은 세 개의 영상채널 안으로 편입시켜 결과적으로 에세이 필름 본령에 충실한 작품이 됐다.

세 작품에서 송상희는 이처럼 텍스추어가 다른 이미지들을 연결하고 배치하여 인터미디어가 생성시키는 이질적인 시공간 경험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예술의 장르적 관습을 차용하고 변환시키는 테크놀로지 와 동기화되어 역사적 지남력과 감수성을 부트스트랩 하는 자원이 된다. <아가>는 인터미디어 모자이크 위로 아카이브를, 이를테면 가장 핵심적인 문양으로 돋을새김 한다. 우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아카이브 영상과 사진 자료가 컴필레이션 되는데 간첩단 조작 사건과 대기근, 집단수용소 장면 등 국가권력이 자행한 끔찍한 사건 기록물에서 추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체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사건들인 셈이다. 그런데 막상 작품 속에서 다른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와 뒤섞여 몽타주 될 경우 이미지 클립은 그 시대 그 사건과 직접 접촉하여 만들어졌다는 지표와 색인답게 유난히 도드라진다. 사진 현상액에 담가 지금 인화하는 듯한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 아카이브 사진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팩트로 다가온다. 또 체르노빌 박물관의 다큐멘터리 모니터를 재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은 역사 인덱스라기보다는 영화적 실물로서 지금 우리 몸에 부딪혀 곧바로 반응한다. 곁에 편집된 아웃도르프 해변가의 커다란 알이나 건너편에 영사되는 체르노빌 인공연못 속 돌연변이 거대 메기는 이를 촉발하는 또 다른 유기체이자 환경이다.

-하이퍼아카이브 충동
양식적으로 유사한 세 작품을 연속해서 리뷰하면, 아카이브는 이들 작품의 구성요소일 뿐 아니라 실재와 창조적이고 윤리적으로 대면하게 하는 영화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역사와 기억을 재현하는 복잡한 과정에서 주의 깊은 관찰자에게 요구되는 예술 기억술도 활성화된다. 그런 점에서 각기 미래-과거-현재에 방점을 찍으며 순환하는 아카이브 삼부작이라 할 만하다. 우선 디스토피아 미래를 기계적이고 차가운 방식으로 도큐멘트하는 <안양>은 종말 이후 미래 상황을 앞서서 기록할 뿐 아니라 ‘안양’을 미래를 위한 아카이브로 남겨둔다. 한 해 뒤 <변강쇠歌>는 19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도처에 쌓여있는 호모 사케르의 죽음을 아카이빙 한다. 특히 연대기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그러나 거의 강박적으로 죽음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희생자들의 얼굴 드로잉 그리고 텅 빈 두건이 허공에 떠 <노처녀歌>를 음송하는 설치작품이 더해지면, 벽면과 천정 구조가 노출돼 있는 아트 스페이스 풀은 그대로 고딕적 소환이 이루어지는 아카이브 공간으로 변모한다. <변강쇠歌>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가 집단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깊이 빠져들던 시기에 착상됐다고 한다. 저 끔찍한 인재人災의 여파가 작품 속 전염병처럼 피부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지경에, 완강하게 물질적이고 파편적인 아카이브 구성방식은 실존적 충격과 예술가의 책무 사이에서 생겨난 징후 또는 증상 에 다름 아니다. 한편 한국의 ‘촛불 혁명’ 이후 전시된 아카이브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 <아가>는 지금 현재 가득 차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사진 측면에 SF장면으로 연출된 해변가의 알이 구르고,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인터뷰와 우크라이나 프리피아트 풍경을 이어 붙이는가 하면, 국내외 지석묘와 여러 국적의 살아있는 손 드로잉이 나란히 놓인다. 과거 아카이브는 절대적인 기원이 아니라 모호한 추적의 단서를 제공하고 촬영 다큐멘터리와 연출 자료화면은 아직 의미가 확충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로서 미래를 향해 줄기차게 흐른다.

역사기술의 객관성을 둘러싼 논쟁과 사료를 선택, 분류, 축적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오래된 역사 철학의 문제는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지식과 정보의 위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특히 아카이브 필름이 양차 대전 이후 크게 늘어났다 는 사실은 죽음이라는 토픽을 영화 매체로 기록하고자 할 때 곧바로 윤리와 심미적 권력의 주요쟁점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쟁과 제노사이드, 기아, 인체실험과 역병과 같이 근대 (아카이브)가 ‘들판에 버려둔 죽음’ 을 수거하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아카이브 제도에 관한 관점과 입장을 요구한다. 대체로 이런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시적인 접근과 환유에 대한 강조, 환상과 무의식에 대한 탐색을 통해 기존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는 측면에서 반아카이브 경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송상희의 아카이브 작업은 <아가>에서 국가권력이 버린 사람들을 촛불로 초혼하는 장면이 상징하듯, 결과적으로 대항 기억을 키워내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아카이브는 ‘고아와 같이 버려진 필름’ 에 영양을 주어 거두는 유모-코라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송상희의 아카이브 작업은 노스탤지어에 빠져서 아카이브를 키치화하거나 형식미에 치우쳐 현실 적합성을 간과하는 추상화 오류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무질서하고 비체계적이며 우연적인 과잉축적을 통해 아카이브의 존재 자체를 과장해서 드러내는 편을 택한다. 기존 아카이브 위로 낯선 이미지, 시어에 가까운 텍스트 그리고 장엄한 사운드를 집요하게 중첩해 넣음으로써 하이퍼아카이브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편으로 이는 더 이상 새로운 이미지를 찍을 필요가 없다는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인용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 아카이브 자체가 부재했던 한국 역사에 대한 반작용 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의 이미지, 두 겹의 피부
삼면 영화 <아가>에서 가운데 화면에 나오는 첫 이미지는 미끌미끌한 타일 바닥이다. 곧이어 장식 무늬가 있는 벽면과 거칠거칠한 벽돌벽이 나오고, 좌우 화면으로는 삭막한 땅이나 자갈밭, 먼지 길도 등장한다. 인덱스에 따르면 모두 대량학살이나 비극적 사건과 관계가 있는 현장이다. 직접 방문하여 촬영한 작가에게는 세계사 현장이 사건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에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피부 로 다가왔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의 피부는 모두 상처가 있다. 영화 끝부분에서 화상 입은 피부를 손으로 더듬어 가는 장면을 보이는 대로 읽자면 더 그렇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를 역사의 피부로 규정할 때, 사실 중요한 것은 피부가 아니라 피부가 찢겨져 드러난 상처였다. 상처를 통해 필름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역사의 진피, 곧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실들이 드러난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카이브 필름 주류를 이루는 기록 영상은 - 어디나 있는 카메라와 그보다 더 많은 스크린 덕분에 - 역사의 피부를 재생하지만, 피부는 생겨나자마자 바로 벗겨지고 만다. 반면에 원래 패브릭에서 뜯어낸 아카이브 영상을 현재의 새 영화로 접붙일 경우, 우리는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 역사의 실체와 대면한다. 무한 박피되는 역사의 피부에 이렇게 상처를 내서 생겨난 제2의 피부는 어떤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주제의 표면 뒤에 항상 낯설고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의미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해준다.

<아가>에서 아우라를 풍기는 아카이브 영상 중 하나는 나치의 인종교배 실험 아기농장을 찍은 클립이다. 텍스트로 등장하는 아기장수의 어여쁜 아가와 아기 이미지는 심각하게 어긋나고, 꿈틀거리는 생명은 곤충 드로잉과 겹치면서 오히려 번식의 집요함을 각인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이미지 운동이 더 격해질수록 생명체는 시체와 같은 이물감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이렇게 아기들이 꾸물거리면서 화면에 없는 죽음을 보게 만드는 상처가 나고, 드러난 진피 사이로는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 인종교배 실험에서 자행된 장애아 제거 그리고 탈출하던 배에서 일어난 난민 살해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다시 텍스트 표면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비정상’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계속 살해당하는 아기장수의 날개와 부딪히게 된다. 이중으로 겹쳐 인화되는 이미지들은 되묻는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영화 편집 컷이 말 그대로 필름에 난 상처라면, 우연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드러내는 편집 방식에 의해 이미지 피부 아래 드러나는 상처의 의미가 좀 더 급진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아가>는 세 개의 스크린에 쓴 에세이 필름이다. 세 채널로 이루어진 영화가 요즘 전시장에서 드물지 않지만, 특히 이 작품은 떨어져 있는 스크린의 홈통-컷을 건너 수평적 시야
를 최대한 확대하고 있다. 촬영 장면에서는 좌우 틸트 샷이 움직임을 만들고, 에세이 필름을 읽기 위해선 텍스트와 이미지 컷으로 시선을 자주 수평 왕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질적인 텍스추어의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그리고 암전과 화이트아웃 샷이 봉합될 때 그 방식은 ‘수평적 몽타주’ 에 가깝다. 샷과 샷을 순차적으로 이어 시간을 지속시키기는 영화와 달리, <아가>는 개념과 사상을 복화술하는 이미지를 옆으로 늘어놓고 측면들을 붙여 시공간을 연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편집 리듬은 <아가>의 의미 구조를 모든 차원에서 다방향으로 열려있는 복잡한 그물 조직 같은 것으로 만든다.

<아가>에서 아웃도르프 바닷가에 뿌려진 알은 아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알이 살아 움직이다가 수레에 쌓이고 그 위로 식물이 자라나면서 알이 내포하는 의미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옆에 놓일 경우 이 광경은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기들을 상여에 실어 멀리 보내는 장면으로 읽힌다. 한편 하얗고 동그란 알이 원형 패턴으로 이어지면, 동그라미는 벽면의 총격 마크, 나비 날개의 눈알무늬, 뻐꾸기 알, 녹조류 세포 그리고 다시 텍스트의 콩과 팥으로 꼬리물기를 하면서 변모한다. 그러다 보면 알 위로 점점 무성해 지는 식물은 이런 생성 연쇄를 집약한 하나의 생명 이미지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화면 안으로 반복해서 굴러들어 오는 원형 패턴은 (존재를, 사건을,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애써 눌러 왔던 것들이 결국은 복수하고 만다 는 아카이브의 자생적 탄력성을 상징하는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알은 속이 텅 비어 있어, 수평 편집의 리듬을 알리는 시간의 부표浮標일 수도 있겠다.

세상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
20 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아가>와 <세상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2017, 이하 세상)를 이어주는 미디어는 사운드다. <아가>의 화면이 끝날 즈음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타일 벽에 도달하면, 중간 중간 설치된 스피커에서 낯선 말들이 뒤섞여 나온다. 태양계 무인 탐사선 보이저1호(1977)의 골든 레코드에 실렸던 55개 언어로 된 평범한 인사말을 구글 음성번역기로 재생한 소리라고 한다. 이 소리가 <아가> 화면에 나오는 <지구의 음악>과 교차하며 텅 빈 공간 속에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면, 반짝이는 스피커 불빛은 ‘인공위성처럼’ 또 다른 스피커와 혹은 우리와 교신하는 것 같다. 이때 기계음으로 들리는 브로큰 코리안은 우주에서 되돌아온 지구의 소리답게 낯설고 괴이하다.

인테리어 소재로 쓰이는 타일 또한 우리에겐 인사말처럼 평범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과 링크돼 <아가> 화면으로 되돌아갈 경우, <세상>의 타일 벽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생겨난다. 화면 속 생체 실험실 벽면에 있는 구멍과 침대 표면 타일 위로 난 칼자국은 거대하고 매끈한 타일 벽에 역사의 상처를 낸다. 가정용으로 흔히 쓰이는 타일이 이미 오래전부터 실험실이나 고문실 벽도 가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또 가까이서 보면 델프트 블루 타일은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서 늘 보는 폭발 장면들을 이미지 프로세싱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중국에서 건너와 네덜란드에서 토착화된 델프트 블루 도자기는 타일 인테리어와 만나 일견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보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죽음과 공포가 가득한 바깥 풍경을 인테리어 벽면 위로 전사하는 순간, <세상>은 폭력에 무감각해진 우리 이성을 계몽하는 트리거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의 타일 벽은 또 다른 제2의 피부로서, 보호 기능이 있지만 쉽게 부서지고 가리기도 하지만 드러내기도 하며 연결하지만 곧바로 떨어져 나간다는 속성을 공유한다.

어떤 면에서 <세상>은 여전히 송상희의 아카이브 작업에 속한다. 타일 그리드 위에 얹은 그림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의 교역사가 녹아 있고 종교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교차점도 엿보인다. 여기에 2차 대전 원자 폭발 버섯구름에서 ISIS의 공습 폭발 구름까지 시대별, 지역별로 수집된 폭발 이미지가 겹쳐진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발견됐다는 목욕탕 아카이브 와 마찬가지로 타일로 이루어진 <세상>의 사운드 아카이브도 자료와 정보를 보존하는 동시에 훼손한다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컨대 지구 아카이브 골든 레코드에서 추출된 음성들이 구글 아카이브를 통과할 때 이미 사라진 언어가 레코드에 저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반면 우주시대에 초강대국이 독점하고 왜곡했던 지식정보 데이터는 전지구화시대 초국적기업에 의해 더 폭발적으로 변형, 가공되고 있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스크린과 모니터가 포화상태에 이른 지구 위로 폭력의 이미지들을 몽타주 하고 있는 역사의 피부막 앞에서 나는 의심하게 된다. 이들이 매끈한 타일 벽 안에 갇혀버린 이미지처럼 쿵 소리 한 번 없이 봉합되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작품 제목은 T.S 엘리엇의 시 <텅 빈 사람들>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1차 대전으로 유럽 대륙이 화염에 휩싸였던 시기에 쓰여진 시는, 21세기 초에도 끊이지 않는 폭음 소리를 배경으로 크리스 마커의 디지털이미지 작업에서 인용된 바 있다 . 이제 다시 송상희 작업에서 <텅 빈 사람들>은 온 지구를 뒤덮고 있는 폭발의, 소리 없는 이미지와 연결된다. 세상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고 성실하게 추적할수록 더 발가벗겨지는 역사의 피부를 가리기 위해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잎사귀 옷도 가죽 옷도 아니다. 그 대신 송상희는 투명 박스테이프를 뒤집어 몸을 칭칭 감는다 . 그리고 온몸을 굴려 끈적거리는 제2의 피부로 지구 위에 떨어진 폭발 먼지를 꼼꼼히 수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