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저항하는 노골(露骨)의 서정

안소현(아트스페이스 디렉터)

야만을 이야기하는 서정의 야만
서사 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덩어리다. 그 덩어리를 흩어놓거나 거기서 한 토막을 떼어내면 그 틈새로 많은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소태 같은 현실을 덮는 달콤한 서정이, 준엄한 역사성을 밀어내는 젠체하는 무의미가, 그리고 논리적 인과성을 약화시키는 무책임한 유미주의가 자리하기도 한다. 송상희를 향한 의심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녀가 다루는 서사들은 설화와 신화, 전쟁, 이데올로기, 이상향, 자원고갈과 오염, 핵문제, 성노동자, 생물의 멸종 등 크고 오래되고, 원대하고, 비극적이어서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엄청난 서사들을 충실히 설명하거나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그저 역사의 한 장면을 발췌하여 다른 이야기와 뒤섞거나 느닷없이 눈앞에 펼쳐놓을 뿐이다. 때문에 송상희의 의도는 서둘러 희화화와 연민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실 작가는 가끔 부인할 수 없는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리바이어던은 코오라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나는 그냥 느낌으로 남아있고 싶어"<변신이야기 제16권>(2008)
물론 어떤 의심에도 불구하고, 송상희의 작업은 정은영이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엄청난 역사 밑에 짓눌린 "비체(卑體) 들의 귀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송상희는 강요된 이미지에 구속된 여성, 성노동자,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사라진 동식물을 이야기를 통해 불러낸다. 하지만 그녀가 다루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고대의 신화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이고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역사라면, 그 앞의 희화화와 연민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야만이라고 했으며, 시인 진은영은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런 비판은 송상희가 펼쳐놓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끝낼 때까지 유예시킬 수 있다. 어쩌면 발췌되고 뒤섞인 서사에서 희화화와 연민을 앞세우는 것은 그녀의 성급함이 아니라 서정을 무조건 이성의 반대편에 위치시키는 우리의 성급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은 신화와 산 신화
인천 월미도를 배경으로 한 세 장의 사진 <푸른 희망Blue Hope>(2004)은 서로 다른 시대의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가운데 사진은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아카이브 자료이고, 왼쪽은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아내의 이야기인 망부석 설화를 연출한 사진이며, 오른쪽은 왼손을 잃고 휴가로 월미도에 놀러 나와 환한 미소를 짓는 1960년대 버스 안내양을 재현한 장면이다. 이 세 사진에는 월미도라는 배경 외에 특별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진들이 나란히 놓이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꿰이기 시작한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 신화의 핵심이었으며, 망부석 설화는 수동적인 인고의 여성상을 오늘날에도 재생산하고 있고, 버스 안내양의 미소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근대적 허상" 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세 이야기들은 모두 롤랑 바르트가 말한 오늘의 "신화"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원래 이야기가 갖고 있던 의미를 잃은 채 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 텅 빈 기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송상희는 이렇게 사전적 의미의 신화와 역사의 한 장면들을 현실 속에서 뒤섞어 현재 진행형인 신화를 드러내려 한다. 기원전 58년 해모수가 버렸다는 알이 은평구 녹번동의 쓰레기장에 굴러다니고(<버려진 알>), 기원전 2373년 동굴을 뛰쳐나와 영웅이 되지 못한 호랑이가 북한산 등산로에 웅크리고 있다(<태평성대를 꿈꾸는 호랑이>). 1970년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발견된 여인의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가져다 놓았다는 고무통(<빨간 고무 바케츠>)과 1981년 홍은동에 검은 비닐 봉투가 버려진 후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축구공 이야기(<저절로 모여드는 축구공들>)는 그것들의 ‘있음직하지 않음(invraisemblance)’으로 인해 현실의 신화성을 발가벗겨 놓는다. 사전적 의미의 신화와 현실을 섞는 기법은 애니메이션인 <변신 이야기 제16권>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원래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천지창조부터 로마의 카이사르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사들을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엮어 놓은 것으로 총15권으로 되어 있다. 송상희는 각각 인간, 국가(사회),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가상의 동물들인 코오라(아메바), 리바이어던(고래), 그리고 플라시오사우러스(공룡)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변신이야기의 제16권을 상상해낸다.
익숙한 신화를 통해 덜 익숙한 신화를 드러내는 것, 누구나 허구라고 생각하는 고전적 신화를 현실과 결합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현대의 신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송상희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사람들이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거나 그 허상을 폭로하는 순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신화는 그 둘 모두가 아닌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자연스러워질 때’ 작동하며, 바로 그때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 이 때문에 바르트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신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를 예로 든다. 플로베르는 인물들이 온갖 학문을 신화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우유부단함, 허세 등을 통해 희화화 하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신화를 신화화하기"라고 부른다. 송상희의 전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과거형이 된 죽은 신화와 현실을 결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신화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망부석을 흉내 내는 작가는 어색하게 이름표를 들고 서있고(<푸른 희망>), 다시 인간이 되려는 호랑이가 가짜 꼬리를 늘어뜨린 동굴 앞에는 생경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호랑이>).
하지만 송상희의 이런 전략은 단순하고 기계적인 결합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이 실소(失笑)나 황당함에 만족하거나 “우리는 신화 속에 살고 있다”라는 단조로운 결론에서 만족할 위험을 몰아내지 못한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현재 진행형인 비극 앞에서 우리가 헛웃음과 신화성의 인지로 만족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이렇게 죽은 신화로 산 신화를 드러내는 방식만으로는 아직 송상희의 서정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노골의 서정: 내용의 반서술
죽은 신화로 산 신화를 드러내는 방법 외에, 송상희가 신화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의 전체가 아닌 한 순간, 한 장면만을 떼어내어 재현하는 것이다. 1983년 대한항공 007기 피격사건을 다룬 영상 <신발들 >(2010-2011)에서 작가는 사건의 한 순간을 재현한다. 당시 구소련 정부는 블랙박스나 잔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채 유족에게 바다에 떠 있던 유품들만을 돌려보냈다. 작가는 미궁에 빠진 사건의 의혹을 규명하려하기 보다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신발들이 바다에 떠있는 장면을 고요하게 되살린다. 의혹투성이인 육영수 피격 사건을 재현한 영상 <국립극장>(2004)에서도 작가는 증언이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록 이미지를 보며 같은 장면을 18번이나 되풀이 한다.
위 사건들은 분명 과잉 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며, 그 이데올로기를 배양하는 신화에 뒤덮여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건들이다. 혹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덕에 더 크고 강한 신화를 반복 생산한 사건들이다. 따라서 성실한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당시의 증언과 기록을 찾아내 감춰진 진실을 추적하고 폭로하여 사건을 둘러싼 인과관계를 밝혀낸다면 신화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다. 그러나 송상희는 사건 전후의 인과관계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그 시점, 사건의 현재를 끌어다 눈앞에 펼쳐 보이는 일에 매달린다. 왜 작가는 이런 부분적인 발췌와 직접적인 재현에 만족하고, 객관적 근거에 의한 폭로를 시도하지 않는가? 작가는 예술은 무거운 역사에 대한 가벼운 유희적 접근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것은 현대사의 엄청난 사건들을 너무 쉽게 사유화하는 행동은 아닌가?
그러나 송상희가 끊어 가져와 재현한 장면에서 의미전달에 기여하는 요소들의 효과를 더듬어보면, 그것들이 명징하나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송상희의 작품 속 ‘이야기’들은 끊어낸다고 해서 그 전체를 떠올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큰 사건’이거나 ‘인구에 회자되어온’ 이 이야기들은 수없이 반복된 탓에 아무리 한 장면을 떼내어 가져온다 하더라도 언제나 전체가 따라다니는 이야기들이다. 제라르 즈네트Gerard Genette가 그의 문학서사론에서 구분한 용어를 쓰자면, 송상희가 다루는 이야기(histoire)는 어떤 서술행위(narration)로 전달되든 전체의 구조를 보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야기들은 이미 고착되어 있기에 작가는 다양한 서술행위에 따라 전달된 결과인 서술(récit)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송상희가 줄거리를 설명하지 않고 한 장면을 발췌해도 이야기가 따라 올라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복된 이야기의 한 장면을 끊어낼 때 어떤 효과가 있는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설령 그것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고 성글어지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기대치를 형성한다. 바르트는 그런 코드의 인식, “우리가 지배하는” 문화의 평온한 소비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실상은 잘 알고 있지 않은 사건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비극적 사건이 일으키는 불편함을 줄이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송상희가 한 장면을 떼어낼 때 그 평온함 역시 산산조각 난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언어화되어 잘 가라앉고 추상화된 편안한 과거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현재가 되어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그 장면들은 새삼스럽게 비극성을 되찾는다.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그 순간을 터질듯이 채우고 있던 세세한 움직임, 변화, 정서 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듣고 싶지 않은 의혹들이 다시 끌어올려지며 온갖 불편함들이 여과 없이 들춰진다.
이런 발췌는 일련의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지만, 서술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오히려 편집증적인 세밀한 묘사를 한다는다는 점에서, 알랭 로브-그리예가 이름한 “반서술(dysnarr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서술은 서술의 "자발적인 부인 과정"으로 독자-관객의 다양한 환상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즉 서술이 실재 세계의 반영이며, "연속성과 인과의 논리를 따른다는 환상", "이야기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없을 거라는 서술의 투명성, 중립성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효과를 갖는다. 송상희의 반서술행위는 역사를 신화화 이전으로, 화석화되기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신화화는 암묵적이고(사회의 이해관계가 의도적이었다 해도 언제나 그 의도를 감추어야 한다) 물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과는 달리, 신화를 "반서술하는" 행위는 애써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란 듯이 노골적이고 수행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행위 자체가 별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끌어들이는 서사의 성격에 따라 혹은 그것이 노출시키는 신화가 질기고 드셀수록 모아들이는 에너지는 크다. 그런 점에서 송상희가 시각적 재현이외에 자주 사용하는 ‘수집’ 또한 강력한 반서술행위가 될 수 있다. 성매매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 성노동자들이 쓴 시를 수집하기도 하고(<달맞이꽃>(2006)), 반세기 전에 누군가가 꽃을 말려 수집한 것을 벼룩시장에서 사오기도 하고(<이것은 반복이 아니다>(2013)) 미량이지만 방사능을 배출하는 우라늄 글래스로 만든 식기를 모으기도 한다(<크리스마스 디너 테이블>(2012)). 또 어느 도시의 시민들의 오래된 편지를 모아서 낭독하기도 한다(<오래된 편지>(2014)). 이런 방법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애니메이션이나 연출된 재현보다 더 단적(端的)이고 직접적이다. 송상희는 수사관이 되어 퍼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면을 대뜸 가져다 놓는다. 송상희가 모으는 사물들은 이미 그 안에 엄청난 서사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모아 놓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그 서사를 가리키면서 반서술의 효과를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송상희의 수집, 이 수행적인 행위가 흔히 말하는 꽤나 현대적인 미술의 방식, 즉 전유의 행위로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상희가 자신의 재현과 수집 행위를 지켜보면서 만족하는 침착한 자기-관찰자가 될 리 만무하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암스테르담의 집창촌에 조명으로 텍스트를 보여주었던 <달맞이꽃>은 그 밝음을 불편해 한 성노동자의 항의로 곧 바로 철수하였다. <이것은 반복이 아니다>에서는 50년 전의 말린 꽃 옆에 작가 자신이 같은 꽃을 따서 조심조심 말려서 붙여놓으며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50년의 시간을 존재하게 하려 애쓴다. 북해도의 바다에 신발을 띄워놓고 밤새도록 하염없이 바라보는 카메라의 눈은 (이 작품은 한 곳의 장면을 35분 동안 보여준다) 배를 타고 현장을 방문했던 유족들의 허망과 절망을 타고 일렁거린다. 다시 말해 송상희의 수집은 타인의 목소리에 서술을 맡기는 거리두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조심스러움으로 인해 일반적인 역사서술에서 배제되기 마련인 정서와 감상을 되살려 놓는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그 서정성 때문에 송상희의 직접적 재현이나 수집행위, 즉 가공되지 않은 방식들은 예술에서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곤 하는 자기규정적 태도, 즉 전유와 차용의 신화로 매몰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형식의 해체가 어떻게 다시 또 다른 신화에 잡아먹히는지 자주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시에서 고전시의 규칙이라는 합의된 신화에 저항하기 위해 기호들의 표면상의 무질서를 만드는데 그로 인해 시는 텅빈 기표로 변형되어 또 다시 신화의 먹이가 된다. “신화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시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신화에 항복” 하고 마는 것처럼 때로 현대미술은 저자성(著者性)의 신화를 거부하다가 또 다른 신화에 매몰되고 만다. 송상희의 서정에 대한 변명은 바로 여기서 주어진다. 서정은 송상희가 이야기를 가져와 반서술을 통해 그것을 신화 이전으로 되돌리려 할 때, 그 이야기의 전달방식이 현대미술의 신화로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중의 보호장치로 익숙해진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이 텅 빈 껍데기로 남지 않게 만들어준다.
송상희의 드러냄은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합법적 제도와 이성적 역사의 서술, 도시의 통계가 담아내지 못하는 감추어진 어떤 것을 드러내지만 어떤 경우든 그것에는 자신이 진실의 전령이라고 으스대지 못하는 작가의 조심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다. 그 때문에 송상희의 드러냄은 역사를 보는 냉정한 시선이라기보다는 차마 거리를 두지 못하는 작가의 서정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작가의 직접적인 드러냄은 어원 그대로 읽은 “노골(露骨)”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린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눈앞에 드러내는 것이지만, 치밀한 계획에 의한 폭로가 아니다. 송상희가 먼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뼈를 이슬 맞게 하는 것, 역사와 신화 밑에 묻힌 조각난 뼈들을 추려 적시는 일이다. 잊혀지거나 추상화된 과거를 오래된 이야기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물건들을 끄집어내서 되살리는 것이며 그 결과는 메마른 서술이 아니라 축축한 서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냉정하고 세련된 조사가 아니라 씻김굿의 의식처럼 때늦은 애도와 시혜적이지 않은 연민과 어쩔 줄 모르는 공감의 의식이다. 송상희가 직접적인 재현의 방식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수집하여 그저 펼쳐놓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고 세련되고 능숙한 전유의 작가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만일 이 서정이 당장 오늘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여전히 위험하게 짧은 연민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이 야만이 되는 이 시대에도, 송상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지 않다. 그것은 길고 긴 수치심으로, 30년 전의 비행기 격추 사건, 50년 전의 꽃, 심지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등장한 성매매, 석유시대로 길게 이어진다. 송상희의 노골의 서정은 질기고 촌스럽다. 그래서 반서술을 통해 오래되고 익숙한 신화에서 벗어나면서도 현대성이라는 신화로 함몰되지 않도록 저항한다. 가장 날것의 서정으로 가장 먼, 잊혀진 서사를 끄집어내는 것, 우리가 송상희가 서정으로 서사를 덮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했던 바로 그 대목에서 또 다른 신화에 저항하는 힘을 발견한다. 그리고 신화를 거부하는 송상희의 노력은 그런 노골의 서정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통해서도 정당화된다.

관념과 감각의 대비: 표현의 반서술
이야기의 한 장면을 떼어내어 가져오고 직접 눈앞에 펼쳐놓는 반서술의 효과는 불편함을 만들고, 그 불편함만으로도 작업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송상희는 더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옐름슬레우언어학의 구분법으로 설명하자면, 작가는 재현과 수집을 통해 얻은 ‘내용’, 즉 관념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진술해주는 ‘표현’을 끊임없이 다듬고 고민해 왔다. 광개토대왕비를 주방용 비닐 랩과 테이프로 본을 떠 만든 <신기루>(2006)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송상희는 관념적 무게의 대비에 예민해졌음을 드러낸다.

"물성이 주는 느낌이 곧 개념이 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또한 손과 몸을 쓰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인간의 노동력이 주는 절대적인 에너지의 무게와 그 에너지들이 한 순간에 쫙 빠져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상태, 이 상반된 두 가지 무게들이 같이 작동되는 작업[…]"

이 때 커다란 광개토대왕비를 비닐랩과 테이프로 본을 떠내는 고된 노동의 무거움은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본을 떠서 만든 반투명의 텅빈 껍데기의 구조물을 매달아서 드러내는 가벼움은 실재적인 감각의 효과 혹은 그 감각적 효과에 대한 짐작을 통해 느껴진다. 다시 옐름슬레우의 구분에 따르자면 이것은 관념의 어떤 특징 혹은 조직(내용의 형식)을 찾아낸 뒤, 시각적 표현의 특징(표현의 형식)과 대비를 이루도록 만든 것이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탁본을 뜨는 노동행위의 에너지의 무게를 말하고 있지만, 그 무거움은 사실 비석이 재생산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작가가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무거움(내용의 형식)을 노동의 고됨으로 표현한 후(표현의 형식1), 다시 비닐과 테이프로 만든 비석의 껍데기의 가벼움으로 표현하여(표현의 형식2), 1과 2의 대비를 만들어낸다.
이런 내용의 무게와 표현의 무게의 대비는 송상희의 작업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라디오>(2009-2012)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인터내셔널 가>, <아침 이슬> 등으로, 역사적 무게가 가득한, 실은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과도하게 실린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 무거운 노래를 소개하는 목소리는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누군가가 써준 원고를 매끈하고 실수 없이 읽으려는 무미하고 심드렁한 목소리다. 비장하거나 선동적인 어조를 기대하게 하는 무거운 대상들을 그 기대를 저버리는 목소리를 통해 낯섦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반서술이다. 내용에 걸맞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걸맞지 않다고 길들여진 인식에 낯선 서술방식으로 인해 그 결과가 달라진다. 이것은 이야기의 한 부분만을 떼어와 서술함으로써 낯설게 만들었던 내용의 반서술과 구분되는 표현의 반서술이다.
아마도 송상희가 표현의 형식에 예민해진 것은 <달맞이꽃>의 전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노동자들이 쓴 시를 조명을 이용해 전달하려 한 것은 아마도 벽에 붙은 종이의 물성이 주는 선언적이고 시위적인 성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며, 붉은 빛이 가득한 거리에 다른 종류의 빛을 살짝 더함으로써 가장 조심스러운 방법을 택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심스러운 표현마저도 그 밝음 때문에 그녀들의 현실에 부적절하고 폭력적인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현실은 그토록 민감한 감각으로 작동되고, 상처를 주며, 그 상처들은 역사에 묻힌다는 것을 예민한 송상희는 모골이 송연하도록 느꼈을 것이다.
작업을 통해 점점 섬세해진 송상희의 표현의 형식 실험, 관념과 감각의 대비는 <그날 새벽 안양: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 >(2014)에 압축되어 있다.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이라는 도시명에서 시작된 이 영상설치는 안양의 현재 모습들을 촬영한 화면에 음악과 이상향을 다룬 소설들의 문장을 더하고, 그 문장들과 연관된 드로잉 및 조명을 함께 배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송상희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조각들을 잘라다 눈앞에 갖다 놓거나 기성 텍스트를 발췌해서 그냥 옮겨놓았다는 점에서 작가 특유의 직접성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표현들을 충돌시키는 방식은 한층 복잡해지고 섬세해진다. 안양의 풍경 속 대상들(관공서, 공공시설, 표지판 등) 자체는 특이할 것이 없지만, 영상의 촬영과 편집 방식, 즉 표현의 형식을 보면 다른 면모에 주목하게 된다. 새벽이라고 설정된 풍경 속에는 사람은 거의 없고 생경한 빛깔의 조명들이 밝혀져 있거나 사물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이런 장면들이 계속되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 공간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평범한 현실의 장면들에는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가 깔린다. 이 음악은 특정한 감정을 재현하기 위한 곡은 아니지만 작곡의 배경(전쟁 중 포로수용소에서 작곡)만큼이나 결코 가깝지 않은 ‘다른’ 세상을 향하게 하기에 충분히 웅장하다.
이 장면들 사이에 삽입된 문장들은 조지 오웰의 <1984>(1949),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그리고 한국 최초의 성인 과학 소설이라고 알려진 문윤성의 <완전사회>(1967)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이 소설들은 그것이 비관적이건 낙관적이건 간에 글이 쓰일 당시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안양의 현재 모습들 사이사이에 파고들어, 결과적으로는 이 장면들을 현실도, 비현실도 아닌 어느 정도의 ‘있음직함(vraisemblance)’을 보유한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이 문장들이 등장하는 동시에 나란히 놓인 드로잉에는 움직이는 각기 다른 색의 원형 불빛이 비춰지면서 대상들이 나타난다. 여기서 영상, 텍스트, 드로잉은 어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들끼리 상호보완적이 되거나 이미지가 텍스트의 삽화로 기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벙커는 최신식 공기정화장치가 갖춰져 있습니다. 일종의 공동체 사회지요"라는 텍스트가 화면에 나타나면, 드로잉에서는 푸리에가 꿈꾸었으나 근접하지 못한 실패한 유토피아의 모델인 ‘팔랑스테르’의 상상도에 불빛이 비춰진다. "저 자가 바로 국가 전복을 꾀하는 음모자들로 구성된 지하 조직의 두목이다"라는 문장이 나타나는 순간 멸종한 맘모스가 등장한다. 결국 영상, 음악, 텍스트, 드로잉 어느 것도 단일한 가치의 세계(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를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복잡한 배치는 내용의 재현과 수집에 비해 좀 더 교묘한 반서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토피아를 확신하는 낙관이든,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비관이든, 그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에 눈감는 무모함과 순진한 희망과, 현재진행형인 억압에 대한 외면을 딛고 서 있다. 송상희는 그런 현실을 서로 다른 매체들의 교묘한 배치를 통해 일원적 가치의 세계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려 한다.
송상희 정교한 반서술의 표현법은 매체의 속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얻은 것으로, 초기작들과 근작들을 비교하면 그 방식이 점차 미시적이 되고 다층적이 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변신이야기 제16권>에서 서사는 주인공들의 이름과 지명과 그곳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허구의 이야기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고, 정서는 주로 작가 자신의 내레이션에 사용된 단어로(사랑, 슬픔 등) 전달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이미 알려진 신화와 새로운 신화의 결합에 의해 신화를 일깨우는 선명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항(項)과 항의 일치나 결합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작가는 점차 관계를 이용해서 의식이나 정서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하거나, 보완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교묘하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옮겨간다. <라디오>에서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코드를 제거하였고, <그날 새벽 안양: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방적 가치를 좇아가지 못하도록 건조한 자막과 이미지들을 교차시키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도록 공간 속에서 관객의 의식을 순환시킨다. 최근작 (2014)에서는 원자폭발의 이미지들을 수집해서 장식 타일에 푸른색으로 그려 넣어 역사적 비극과 인류의 공멸을 떠올리게 하는 무거운 내용을 장식적인 표현 방식과 결합시켜 내용과 표현 사이의 간극을 키운다.

역사 속 개체를 위한 탈신화화
송상희가 실험하고, 구축하고, 다듬어가고 있는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을 무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굳이 시효가 지난 사건과 신화를 끄집어내어 기를 쓰고 탈신화화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송상희는 인터뷰에서 <달맞이꽃>을 작업하면서 성노동자들을 "개체"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을 신화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의 개체로 이해하는 방식, 철학자들이 오래도록 붙잡고 늘어진 개체화 원리, 즉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근원적인 원리를 가장 예술가다운 방식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유적(類的) 일반성으로 묶이지 않는 것, 보편과 역사라는 이름 밑에 묻어버린 상처와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송상희는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송상희의 서정은 쉬이 사라지는 짧은 연민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일깨우기 위한 방식이다. 우리가 쉽게 반이성으로 매도하는 예술가의 서정은 어쩌면 가장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 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99쪽.
프란시스 바누아, <영화와 문화의 서술학>, 송지연 옮김, 동문선, 2003.
송상희 우혜수 작가인터뷰, , 삼성미술관 Leeum, 2006
정은영, "송상희-비체들의 귀환", <이대 대학원 신문>, 54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