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한국현대시각예술 작가론>


‘여성되기’의 뒤집기로부터 신화의 해체로

최태만 (국민대 교수)

달맞이꽃
송상희의 작품 중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달맞이꽃>을 들 수 있다. 원래 이 영상설치작업은 성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직접 쓴 시를 모아 암스테르담 홍등가Red Light District의 거리에서 상연한 것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한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성매매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몇몇 여성 성노동자들을 찾아가 자신의 작업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들의 동의 아래 이 시들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암스테르담의 PICProstitution Information Centre의 지지와 도움을 받은 그녀는 이 기관의 협조로 국제성노동자권리위원회 유럽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the Right of Sex Workers in Europe, 국제성노동자연맹International Union of Sex Workers, 성노동자네트워크프로젝트The Network of Sex Workers Project 등 전 세계를 아우르는 성노동자 권익 옹호 단체들과 접촉했고 그 기관들의 메일링 시스템을 통해 총 아홉 편의 시를 수집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들의 삶을 담은 시를 제공한 여성 성노동자들의 신분이 밝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들은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설치하자마자 곧 철수해야만 했다. 작가는 특수 제작한 램프에 부착한 시를 교회 담장에 가로등처럼 설치한 영사기를 통해 바닥에 투사했다. 그러자 여성 성노동자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이작품들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밝은 빛 때문에 영업에 지장을 초래해 다른 여성 성노동자들로부터 철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야간에 영업을 하는 여성 성노동자는 물론 이거리를 찾아온 남성 고객,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 누구든 보고 읽을 수 있었지만 어두운 거리가 밝아지자 사람들의 출입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바람에 영업방해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마치 밤에 화려하게 피었다 새벽이 되면 지는 달맞이꽃처럼 한때 잠깐 피어올랐다 곧 철거되고 비엔날레 전시관의 어두운 공간 속에서 본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채 ‘전시’되었다.
<달맞이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첫째,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 성노동자들과 협업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영화는 많지만 대부분 ‘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송상희는 그들이 주체가 되어 발언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 그들의 영업 공간 속에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타자화의 경계를 넘어섰다. 결과적으로 여성 성노동자들의 시가 송상희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어 낯선 나라의 한 비엔날레에서 발표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둘째,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성매매 제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을 유지하는 근거이자 수단으로 삼고 있는 여성들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끄집어냄으로써 도덕적, 윤리적, 사회위생적, 인권보호의 목적으로 조사, 작성된 사회조사기관의 실증적 보고서가 도달할 수 없는 개인들의 내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작업에 참여한 여성 성노동자의 수가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이 작품을 통해 익명성을 보장하며 주로 노동 조건이나 노동 환경에만 국한되던 르포르타주가 제공하는 정보로는 알 수 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셋째, 작가의 작업방식이다. 그녀는 아이디어의 구현을 위해 여성 성노동자는 물론 많은 기관들과 접촉했고, 특수한 환경을 지닌 지역사회도 설득했다. 이것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라 불리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주민참여형 과정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연구방법론을 동원하되 그것을 시각적인 작품으로 완결함으로써 작업방식의 경계를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업을 기획, 진행한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 나아가 그녀가 오래전부터 여성의 신체를 문제 삼아왔다는 점에서 왜 그녀가 이 작업을 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억압당하고 감시받는 신체로부터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기계들’이란 제목으로 열린 개인전은 한국 미술계에 송상희란 신진 작가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무대였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인사를 하거나 명함을 주고받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공손하고 사회적인 자세를 만들어주는 자세교정기이자 헬스기구처럼 보이는 <성공을 위한 몸보정기>와 <착한 딸이 되기 위한 몸짓> 연작을 발표했다. 광고의 카피라이트를 연상시키는 문구 즉, ‘일상의 습관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구호 아래 그녀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원만한 대인관계’, ‘적절한 예절’, ‘자신감 있는 보디랭귀지’를 갖추어야 함을 강변하며 아주 태연하게 자신이 디자인한 기계인 ‘인사하기’, ‘명함주기’, ‘발표하기’, ‘웃음만들기’의 제원과 가격까지 밝힌 판촉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했다. 이 기계는 한국 사회에서 세속적 성공을 위해 갖추어야 할 모범 사회인의 전형적 자세를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조야한 형태, 어린이의 장난감처럼 유치하게 칠해진 표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무용지물의 기계이며 심지어 인체를 억압하는 고문기구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주체가 결여된 종속적이고 순응적인 인간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이의 제기이자 풍자적 전복임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작품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성공은 개인의 능동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순응하는 몸 자체이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몸이 숭배되는 현재, 헬스클럽에서 잘 가꾼 규격화된 육체는 몸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고문기계에 의존하여 길들인 신체가 만들어낸 표준화된 예의 바른 자세와 웃음에는 개인도 인간적 에토스ethos도 없다. 단지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허상으로서의 태도만 있을 뿐이다. 이 허구적이며 위선적인 태도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조장한 것이기도 하다.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몸 길들이기’ 속에 개인은 물론 가족, 나아가 사회를 예절과 교양의 이름 아래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시각이 잘 반영된 작품이 <착한 딸이 되기 위한 몸짓>이다. 그중 <바른 자세로 앉기>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 배경과 개념을 밝힌 보드board 앞에 전기의자처럼 허벅지와 발목을 죄는 족쇄가 부착된 금속의자를 배치한 것이다. 가정과 학교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겪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한 이 작품은 여성이 의자에 앉을 때 취해야 할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세가 실제로 한 인격체의 신체를 얼마나 심각하게 억압하는 고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자아이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의자에 앉을 때 절대 다리를 벌려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학교에서도 여학생은 무릎을 붙이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사선으로 놓아야 한다는 예절 교육의 규범을 준수해야 하며, 취직을 위한 면접에서도 이것은 여성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정으로부터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세를 취할 것을 강요받아온 그녀는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고문기구와도 같은 의자를 통해 이것이 예의범절이란 이름 아래 강요된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여성에게 강요된 예의 바르고 아름다운 자세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착한 딸 혹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단적 강박증이자 여성이 가진 공동의 환상’이라고 규정하며, 바르고 아름답게 앉기 위해 고문기계와 같은 의자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결과 개인들은 단순하게 사물화하고 개별성은 소멸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여성다운 자세에 대한 억압은 어머니로부터 딸로 상속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착한 딸’은 일상 속에 여성을 통제하는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이것을 연장하자면 국가가 주입하는 훈육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따를 때 ‘착한 국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감시와 처벌이 규범, 법률, 학교, 군대, 감옥과 같은 기구나 공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을 향한 애정이 깃든 어머니의 보살핌을 보이지 않는 감시로 느낀다면 어떨까. 송상희는 그런 경험을 작업으로 발전시킨 바 있다. 작가가 외국으로 갈 때 어머니는 플라스틱 용기에 밑반찬을 담아 투명 랩과 테이프로 꼭꼭 싸서 건네주었다고 한다. 밑반찬을 먹기 위해 그 랩과 테이프를 벗겨내지만 버리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그녀는 그것을 ‘어머니의 껍질’, 더 나아가 ‘어머니의 시선’으로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어머니의 감시 체제인 랩과 테이프에 의해 봉인되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분신이기도 한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늘 가지고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하찮은 물건에 어머니를 투사하는 것이야 심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존하는 행위를 통해 착한 딸에 대한 환상을 달성한다면 그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머니의 세심한 정이 담긴 그것을 ‘감시의 시선’으로 파악한다면 어머니의 정이 담긴 물건을 보존하는 그 착한 딸은 심리적으로 어머니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쁜 딸’이 될 수도 있다. 이 도발적 위반은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자신의 집에서 자기 몸을 결박하는 퍼포먼스로 나타나기도 했다. 자신의 몸을 양면테이프로 결박하는 행위는 ‘어머니의 감시의 시선 앞에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있어요’란 저항의 몸짓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누에가 고치를 치고 그 속에 안락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듯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요’란 자궁회귀 본능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테이프로 감싸는 작업은 2003년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시도, 발표했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홋카이도의 역사적 인물들, 예컨대 삿포로札幌를 개척한 시마 요시다케島義勇를 기념하기 위해 삿포로 시청에 세워놓은 전신상이나 홋카이도 대학 설립자인 클라크William Smith Clark의 흉상을 투명한 셀룰로이드테이프와 호일로 캐스팅한 작품은 역사적 무게를 지닌 인물을 가볍고 가변성이 높은 소재로 주형鑄型하여 공중에 매달아 전시함으로써 국가 또는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집단 이데올로기를 그 근본에서부터 뒤집고 있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2006년에 이르러 한국 전역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를 모조한 비석을 마치 탁본을 뜨듯 투명테이프로 떠낸 <신기루>로 발전하였다. 마침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가 왜곡되어 중국사로 편입되는 것에 분노하며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던 시기였다. 이 와중에 그녀는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한국과 중국에서 동일하게 정치적으로 도구화되는 메커니즘을 목격하고 19세기의 산물인 ‘민족국가nation-state’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 위해 이 캐스팅 작업에 착수했다. 그녀에게 광개토대왕비는 ‘민족주의의 살아 있는 유령’이자 ‘남근주의적 욕망’의 표상이었으므로 그것을 하나의 신기루로 파악했으며, ‘민족’이란 집단 이데올로기가 걸어놓은 최면과 주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복제를 다시 복제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란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국민을 동질성의 이름 아래 통합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상에 의해 생산된 신화를 유포, 확대재생산해왔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여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민족주의를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했던 것이다. 고대 한국의 난생卵生신화를 주제로 한 <버려진 알>이나 단군신화를 재해석한 <태평성대를 꿈꾸는 호랑이>는 그런 점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지탱하는 신화를 해체하여 우스꽝스런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도발적 상상력이 낳은 모반謀叛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저절로 모여드는 축구공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비등했던 열광적 민족주의를 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월드컵게임이 불러일으킨 브레이크가 파열된 민족주의를 보며 그것이 감정의 차원이 아닌 복잡한 국제적 관계 속에서 강화됨을 발견한 그녀는 미군에 의해 사망한 두 여중생의 죽음이 촉발한 촛불시위와 미군의 사격연습장이 된 매향리를 결합시킨 <매향리>에서 효순, 미선 양으로 분장한 두 여학생이 사격의 표적인 섬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지만 결국 자신들이 쏜 화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사진에 담았다. 이 작품은 두 여학생의 안타까운 죽음이 고삐 풀린 민족주의에 의해 마치 잔다르크처럼 미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여성되기
송상희의 작업은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착한 딸’ 시리즈로부터 2002년 작가 자신이 아들의 주검을 안고 비통에 잠겨 있는 마리아나 한국에서 현모양처의 표상인 신사임당으로 분장하여 촬영한 <아들을 잃어버린 피에타>, <어머니A>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본받아야할 표준으로서의 ‘여성되기’인 바 그것은 지아비를 그리다 돌이 되어버린 비극적 여성에 얽힌 전설을 안고 있는 <망부석>,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버스 차장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로까지 연결된다. 연출적인 특징이 강하여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지표가 될 만한 여성의 전형을 소재로 하여 그 기준이 오늘날까지 어떤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버스 차장은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부침했던 직종을 통해 여성의 노동 현실을 되짚어보고자 했던 것에 의미가 있다. 한때 차장이었던 사진 속의 그녀야말로 ‘청운의 꿈blue hope’을 안고 상경한 여성이며, 그 꿈을 달성하기엔 현실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결국 ‘우울한 희망’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여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출된 사진작업에서 이미 불구가 된 한 손에 대한 상황 설정이 다소 설명적이다 하더라도 인천 월미도 해변으로 소풍을 나와 밝게 웃고 있지만 ‘조국 근대화의 기수’의 대열로부터도 제외된 여성 노동자들의 박탈당한 삶과 비록 현실에서는 배반당하지만 그들이 지녔던 소박한 꿈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망부석>이 오로지 돌아오지 않을 한 지아비를 위해 덧없는 희망을 안고 수절하다 돌이 되어버린 여성의 희생을 거룩한 것으로 만든 설화에 대한 비평이라고 한다면 버스 차장은 근대화 프로젝트의 수치 속에 묻혀버린 개인,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Beauvoir가 말했던 것처럼 여성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되기의 연기는 2004년에 발표한 <영부인A>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화사한 분홍색 한복,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다소곳하게 포개 놓은 두 손과 우아한 자태 등에서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현모양처의 전형은 이 사진작품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 가슴에 매단 훈장은 이미 신화가 되다시피 한 여성에게 바치는 최고의 명예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사진작품과 짝을 이루는 <국립극장>은 이상적인 여성이 흉탄에 쓰러지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실제 1974년 8월 15일에 일어난 육영수 여사의 피격이란 비극적 사건을 통해 한국적 관념에 의해 주조된 여성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는 현장을 재생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육영수는 ‘불멸의 여성’으로 각인돼 있다. 그녀는 생전에 이미 인간적 차원에서의 여성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불멸의 흡인력, 즉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존재의 죽음은 곧 이상적인 여성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의 비극적 죽음은 뒤이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과 함께 급속하게 망각되었으나 작가는 폐쇄된 창고 속에 감춰진 기억을 재생함으로써 이 사건을 현재란 시간 속으로 불러냈던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의 정치’가 작동한다. 즉 작가는 육영수 여사가 살아 있을 당시 제조된 이상적인 존재에 대한 온갖 찬사와 존경, 흠모가 그녀의 죽음을 재연한 동영상에서도 과연 유효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초상사진을 흉내 낸 사진작업과 육영수 여사의 피격을 다룬 동영상은 본받아야 할 모범 여성의 모델을 공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유포한 여성되기 이데올로기의 진원이 실제 그 여성의 삶을 타자화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표준에 맞춰 모든 여성이 그것을 따르게 만드는 건 끔찍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송상희가 보여주는 여성되기는 주체를 포기한 여성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잠복된 허구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표준적인 여성되기가 아니라 자아되기, 즉 주체되기로 방향을 잡을 때 하나의 기준에 의해 규정되고 평가되는 다수의 여성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진정한 여성되기가 설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존재의 소멸에 대해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아마 죽음이 주체를 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죽음에 대해 미리 기억하도록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본 송상희의 작품 중에서 가장 능청맞고 유머가 넘치며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그녀의 장례식>이 떠오른다. 이 작품을 보여줄 당시만 하더라도 그녀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것이라며 다소 수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살한다는 가설에 바탕을 두고 연출한 장례식 장면을 촬영한 것이었다. 그 죄책감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드리워진 병풍, 단 위에 놓은 하얀 국화와 촛불, 영정과 그 앞의 ‘성도 송상희’라 적힌 위패, 기업에서 보낸 조기가 놓인 장례식장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결식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 이 가짜 장례식을 위해 상주나 조문객으로 출연한 사람들의 연기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영정 속에는 실제 작가 자신이 들어앉아 조문객들을 맞아 목례하고 손수건으로 눈물로 닦는가 하면 주기도문을 욀 때는 함께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초기 화면부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연출된 것임을 아주 능청맞게 드러내고 있지만 기독교 장례식에서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찬송가를 같이 부르고 조문객들이 입을 모아 “하느님 아버지, 우리 상희를 용서해주세요”라고 부르짖을 때 영결식의 분위기는 절정에 도달한다. 그녀가 자살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조문객들의 절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수긍이 가지만 원인과 과정이 제거된 채 다짜고짜 죽음의 결과만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 자체도 모호하다. 그녀가 발표했던 작품 중에서 아마 가장 심각하면서 동시에 가장 허구적인, 그래서 재미가 심각함을 앞질러 가는 <그녀의 장례식>은 앉으면 머리 위에 도넛 형태의 전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핸들 앞에 매달린 프레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영정을 촬영하듯 집어넣을 수 있는 전기의자인 <죽을 준비가 되었다>와 함께 죽음을 현재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회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은 당사자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기념의 의식을 통해 기억된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은 항상 당신 곁에 있음을 기억하라 memento-mori’ 란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일까 아니면 어느 날 느닷없이 닥칠 죽음을 예비하여 작성해보는 유언장처럼 죽음의 순간을 미리 연습하기 위한 것일까. 새로운 생명의 탄생만큼이나 죽음이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 의사擬似 장례식이 생경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경계로 그녀가 한국의 중산층에서 태어난 여성이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고백적 작품으로부터 관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상징적인 장례식을 통해 작업의 방향을 바꾸고자 했는지 모른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지구의 참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송상희의 작품은 <바다에서 온 메시지>에 이르러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우울하면서 단호한 경고로 발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로마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신화를 고쳐 쓴 15권짜리 『변신 이야기』에 지구의 종말이란 시나리오를 덧붙인 <변신 이야기 제16권>과 2007년 12월 삼성중공업의 거대한 크레인이 유조선과 충돌하면서 야기된 기름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모항으로 가는 길>이란 두 편의 영상작업으로 구성된 것이다. <변신 이야기 제16권>이 간결한 연필 드로잉을 통해 인간의 형상을 지닌 아메바(코오라)와 공룡(플레시오사우루스)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고래(리바이어던)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인간의 탐욕에 의해 환경은 파괴되고 결국 자연의 복수에 따라 노아의 대홍수처럼 기름이 지구를 뒤덮어 인류는 자멸한다는 결론은 이 작품이 계몽적,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변신 이야기 제16권>과 짝을 이루는 <모항으로 가는 길>은 기름띠로 생태가 파괴된 피해 지역의 참혹한 풍경을 물고기의 시각으로 촬영한 것으로서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닌 모든 생명체가 공유해야 할 생존의 공간임을 웅변한다. 신화, 종교, 진화론, 과학이론과 모형 등을 동원한 이 작품은 인간에 의해 앞당겨진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울한 증언이자 기록으로서 송상희의 작업 방향이 ‘여성되기’의 뒤집기로부터 신화의 해체를 거쳐 전 지구적 문제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이란 공간을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작업하고 있는 그녀가 관심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내린 답안은 너무 모범적이다. 그만큼 우리가 위험에 길들여져 있는지 모르지만 모범 답안은 안이하게 비쳐질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교훈적 경고가 앞선 <바다에서 온 메시지>를 넘어서는 작업을 위해 그녀가 이 모범 답안조차 뒤집어 다시 쓰는 모험을 결행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